[고태용] 트렌드 홍수 시대에 브랜드가 살아남는 법

고태용의 '패션 디자이너의 세계'

 

AI 생성 이미지

 

요즘 옷을 보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거 어디 브랜드였지?" 잘 만들었다. 사진도 멋있다. 스타일링도 좋다. 그런데 브랜드 이름을 가리고 보면 어디에서 만든 옷인지 잘 모르겠다.

 

국내 브랜드들의 수준은 분명 높아졌다. 소재도 좋아졌고, 생산 퀄리티도 좋아졌고, 비주얼을 만드는 능력도 훨씬 세련돼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모두가 잘하게 되면서 모두가 조금씩 비슷해졌다.

 

한 시즌 어떤 실루엣이 반응이 좋으면 비슷한 실루엣이 쏟아지고, 어떤 워싱이 유행하면 몇 달 뒤 수많은 브랜드에서 비슷한 색과 질감이 등장한다.

 

SNS와 알고리즘의 영향도 크다. 우리는 매일 같은 레퍼런스를 보고, 같은 해외 브랜드를 팔로우하고, 같은 이미지들을 저장한다. 그러다 보면 결과물이 비슷해지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트렌드를 따라가는 것 자체가 아니다. 내가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건 브랜드가 왜 그것을 만들었는지 설명할 수 없는 상태다. 유행해서 만든 카고 팬츠. 요즘 잘 팔려서 만든 빈티지 워싱. 이런 선택들이 반복되기 시작하면 컬렉션은 만들어지지만, 브랜드의 역사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나 역시 2008년 브랜드를 시작한 이후 수없이 많은 유행을 지나왔다. 프레피와 스트리트, 미니멀리즘, 빈티지와 워크웨어를 지나 지금은 밀리터리와 아카이브가 또 새로운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다. 그때마다 흔들리지 않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브랜드를 운영하는 사람에게 판매량은 현실이고, 시장의 반응을 무시할 수 없다.

 

18년 동안 브랜드를 하면서 알게 된 건 시장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이 브랜드를 오래 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예전에 만들었던 옷을 다시 꺼내보면 지금 봐도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있다. 클래식한 재킷, 프레피한 니트, 와펜과 자수, 강아지 그래픽. 시즌마다 모습은 달라졌지만 이상하게 계속 등장했다.

 

그때 알았다. 브랜드의 정체성은 어느 날 회의실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반복해서 좋아했던 것들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걸.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에 대한 강박을 조금 내려놓았다. 대신 예전에 좋아했던 것을 지금의 시선으로 다시 보는 일이 재미있어졌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해석했느냐다. 나는 그것이 브랜드의 '번역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번역 방식이 반복되고 변주되면 어느 순간 브랜드만의 문법이 된다. 요즘은 특히 이 문법이 더 중요해졌다고 느낀다. 좋은 원단도 구할 수 있고, 좋은 공장도 찾을 수 있다. AI를 이용하면 이미지와 콘텐츠를 만드는 기술적인 격차마저 빠르게 줄어든다.

 

그렇다면 앞으로 무엇으로 차이를 만들 수 있을까. 나는 오히려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10년 넘게 반복해서 사용한 디테일, 계속 변주해 온 그래픽, 오래 사용해 온 상징. 이것들은 검색한다고 얻을 수도 없고, 한 시즌 만에 복제할 수도 없다.

 

정체성을 지킨다는 것은 18년 동안 똑같은 옷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같은 사람이 18년 동안 살아가면서 생각이 변하듯 브랜드 역시 변해야 한다. 다만 변하고 난 뒤에도 사람들이 "그래도 이건 너희답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작은 브랜드일수록 모든 트렌드를 따라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무엇을 할 것인가 보다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 중요할 때가 있다.

 

브랜드를 오래 하다 보니 '안 하는 선택' 역시 디자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도 여전히 트렌드를 본다. 하지만 이제는 트렌드를 그대로 소비하기보다 그 안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만 수집하려고 한다.

 

브랜드가 살아남는 방법은 트렌드보다 빨리 달리는 것이 아니다. 트렌드는 언제나 브랜드보다 빠르다. 그것을 매번 따라잡으려고 하면 결국 모두가 비슷한 곳에 도착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트렌드가 지나간 자리에서도 남아 있을 자기 언어를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이 '고태용답다', '비욘드클로젯답다'고 기억해준 것이 그것일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새로운 시즌을 시작할 때 이런 질문을 먼저 한다. "이게 유행할까?"보다 "몇 년 뒤 다시 봐도 우리가 만든 것 같을까?" 어쩌면 브랜드를 만든다는 것은 매 시즌 새로운 답을 내놓는 일이 아니라, 오랫동안 같은 질문에 자기 방식으로 답해 나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고태용 비욘드클로젯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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