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미애] AI가 골라준 옷, 손끝이 기억하는 온기

유미애의 '다른 시선'

 

AI 생성 이미지

 

최근 마스터카드가 전 세계 부모와 청소년 2만 6천 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 결과가 눈길을 끈다. 청소년 10명 중 3명은 친구의 추천보다 AI가 골라준 상품을 더 신뢰하고, 4명 중 1명은 부모의 조언보다 AI의 제안을 더 믿는다고 답했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에게 사람의 추천은 주관적인 참견이나 상업적 피로감으로 비친다. 반면 방대한 데이터로 나만을 위해 계산된 알고리즘의 결과는 '편견 없는 취향의 나침반'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숫자를 뒤집어 보면, 청소년 다수는 여전히 AI보다 친구와 가족을 더 믿는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게다가 AI에 대한 신뢰는 AI가 '아무것도 팔려 하지 않는다'는 믿음에 기대고 있다. 그래서 추천 뒤에 광고와 편향이 보이는 순간 쉽게 흔들릴 수 있다. 취향의 주도권이 손바닥만 한 화면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신뢰는 생각보다 얇다.

 

흥미로운 것은 스크린 밖의 풍경이다. 스마트폰 터치 몇 번이면 국보급 유물을 초고화질 3D로 감상할 수 있는 시대인데도, 젊은 세대는 국립중앙박물관 앞에 긴 줄을 서고 '오픈런'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이 손에 넣으려는 것은 반가사유상 미니어처, 고려청자 문양 텀블러 같은 이른바 '뮷즈(MU:DS)'다. 화면 속 디지털 복제물이 넘쳐날수록 손끝으로 느껴지는 무게와 질감, 즉 물성(物性)을 소장하고 싶은 갈증은 오히려 선명해지고 있다.

 

이 장면을 보면서 필자의 머릿속을 스친 것은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철학이다. 스미스소니언의 설립 이념은 '지식의 증진과 확산(The increase and diffusion of knowledge)'이다. 오늘날 이들은 방대한 소장품을 디지털로 아카이빙해 전 세계에 지식을 가장 빠르게 '확산'시키고 있다. 동시에 관람객이 직접 만지고 조작하는 '핸즈온(Hands-on)' 체험에도 꾸준히 공을 들인다. 미국역사박물관의 '스파크!랩(Spark!Lab)'에서 아이들은 발명가처럼 직접 무언가를 만들어 보고, 자연사박물관의 '큐리어스(Q?rius)'에서는 실제 표본을 손에 들고 들여다본다. 눈으로 훑은 지식은 가벼운 정보로 흩어지지만, 손끝으로 만지고 체온을 나눈 경험은 기억 깊숙이 남아 진짜 배움이 된다는 믿음이다. 지식의 확산은 데이터가 맡을 수 있어도, 경험의 깊이는 결국 실체와의 대면이 채운다.

 

패션 비즈니스도 이 궤도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생성형 AI는 이제 패션의 효율을 극대화하는 가장 강력한 엔진이 되었다. 고객의 체형과 취향을 분석해 실패 없는 옷을 추천하고, 룩북 이미지를 몇 초 만에 만들어 내며, 글로벌 트렌드를 정교하게 예측한다. 하지만 AI가 화면 위에서 아무리 완벽한 핏의 확률을 계산한다 해도 대신 전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몸에 감기는 캐시미어의 포근함, 탄탄한 테일러링이 주는 신뢰의 무게, 손끝으로 전해지는 패브릭의 온기다. 기술의 편의에만 기대어 물성의 감동을 놓친 옷은 화면 속에서는 화려하다. 그러나 문지방을 넘는 순간 반품 상자에 담겨 돌아오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데이터의 역할은 물성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물성을 증명하는 데 있다고 본다. EU가 도입하는 디지털 제품 여권(DPP)이 좋은 예다. DPP는 이 옷이 어떤 섬유로,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데이터로 투명하게 보여 준다. 고객이 매장에서 원단을 쓰다듬으며 느낀 신뢰를 기록이 뒷받침하게 되는 것이다. 기술과 실체가 서로를 보증할 때 비로소 신뢰는 단단해진다.

 

결국 AI와 데이터 인프라는 보이지 않는 백엔드에서 고객의 탐색을 돕고 기획·생산·재고 운영의 낭비를 줄이는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확보한 시간과 자원은 옷 한 벌의 만듦새, 타협 없는 소재의 질감, 그리고 고객이 매장에서 오감으로 경험하는 브랜드의 실체를 완성하는 데 쓰여야 한다. 청소년들이 AI의 추천을 믿고 지갑을 여는 시대일수록, 역설적으로 옷은 '손끝이 기억하는 본질'을 지녀야 한다. 알고리즘으로 정교하게 안내하고, 손끝의 온기와 물성으로 감동시키는 것. 화면 너머의 기술과 현실의 실체가 만나는 그 접점에 K-패션이 가야 할 지속가능한 미래가 놓여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유미애 세원아토스 사장

 

 

< 저작권자 ⓒ 어패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