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필호] AI가 실행의 비용을 낮출수록, 기획의 가치는 높아진다
신필호의 '넥스트 이커머스'
요즘 AI를 사용하면서 가장 크게 체감하는 변화는 단순히 업무가 빨라졌다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 자체가 크게 넓어지고 있다. 필자 역시 사회생활의 대부분을 기획 업무로 보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AI는 문서를 작성하거나 데이터를 분석할 때 도움을 받는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아웃바운드 업무를 자동화하는 기능을 만들고, 해외 사업에 필요한 웹사이트도 직접 제작해보고 있다. 과거에는 개발자의 도움부터 구했을 일을 이제는 일단 스스로 시도해볼 수 있게 됐다.
최근 공개된 GPT6 Astra(챗지피티-6 아스트라)나 Claude Fable 5(클로드 페이블 5) 같은 모델을 보면 불과 얼마 전의 AI와도 차이가 느껴진다. 글을 쓰고 자료를 정리하는 수준을 넘어 데이터를 분석하고, 코드를 만들며, 여러 단계로 이루어진 업무까지 수행한다. 그 결과 기업이 아이디어를 실제 결과물로 만들어보는 '실행의 비용'은 빠르게 낮아지고 있다.
기업 현장을 대상으로 한 여러 연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확인된다. AI는 문서 작성이나 아이디어 구체화처럼 목표나 기준이 비교적 명확한 업무에서는 속도와 결과물의 품질을 크게 높인다. 반면 복잡한 데이터를 해석하거나 여러 이해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업무에서는 별다른 효과가 없거나 AI가 제시한 그럴듯한 답이 오히려 정확한 판단이 아닌 경우도 많다.
결국 AI를 사용한다는 사실만으로 좋은 결과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AI가 아무리 강력해져도 어떤 문제에 적용할 것인지, 결과를 어떻게 검증할 것인지, 그리고 만들어진 결과가 정말 필요한 것인지를 결정하는 과정은 남는다. 실행의 상당 부분을 AI가 담당할 수 있게 될수록 문제를 정의하고 방향을 설정하는 기획의 중요성은 오히려 커진다.
우리 회사에서도 최근 마케팅 캠페인 운영 실무자들이 AI를 활용해 업무에 필요한 기능과 자동화 도구를 직접 만들어보는 실험을 하고 있다. 과거에는 현장의 아이디어가 개발부서의 검토와 우선순위 설정을 거쳐 실제 기능이 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은 실무자가 먼저 만들어 사용해보고, 효과가 확인된 기능을 정리해 공식 상품에 반영할 수 있다. 이처럼 아이디어와 실행 사이의 거리가 짧아지면 훨씬 많은 시도가 가능해진다. 완벽한 기획서를 작성한 뒤 개발을 요청하는 대신, 직접 만들어보고 사용하고 실패하면서 빠르게 수정할 수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실행이 쉬워질수록 '무엇을 실행할 것인가'는 더 중요해진다. 누구나 빠르게 보고서를 만들고 이미지를 제작하며 간단하게 서비스를 개발할 수 있어 만드는 것 자체는 더 이상 큰 경쟁력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해결할 가치가 있는 문제를 발견하고 적절한 해결 방식을 선택하는 능력이다.
결국 AI 시대에는 실행력의 가격이 낮아지는 만큼 기획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제대로 된 기획의 출발점에는 상상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상상력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능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하는 일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왜 이 일을 이렇게 해야 하지?", "어디에서 문제가 반복되지?", "조금 다르게 할 수 없을까?"라고 계속 질문하는 능력에 가깝다.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며 느끼는 작은 불편함과 답답함이 좋은 기획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흔히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고 한다. 하지만 숲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결국 어떤 나무들이 있고 각 나무들이 어떠한 환경에서 잘 자라는지 알아야 한다. 현장의 작은 문제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야 무엇을 바꿀지 상상할 수 있고, 그 상상을 실행 가능한 기획으로 구체화할 수 있다.
AI는 우리가 상상한 것을 실제로 만드는 시간과 비용을 계속 낮춰줄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경쟁력은 AI에게 얼마나 많은 일을 시킬 수 있는가보다, AI에게 시킬 만한 일을 얼마나 많이 발견하고 상상할 수 있는가에서 갈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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